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드난 멘데레스 (문단 편집) === 위기 === 1954년, 기후가 악화되면서 장기간 가뭄이 일자, 수확물이 작년에 비해 크게 저하되었다. 튀르키예는 다시 밀을 수입하기 시작했고, 경제성장률도 1953년 13%에서 4% 대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멘데레스는 지금까지 성공을 거둬온 정책을 바꾸지 않고 농업 기술 및 기계 수입을 계속 유지하되 모자란 돈은 외자를 도입해서 해결하기로 했다. 그러자 튀르키예의 재정과 부채는 점점 위험신호를 보였고, 리라화 가치도 계속 낮아져 수입은 더 힘들어졌다. 1950년 3%였던 인플레이션은 1957년 20%로 급증했다. 이에 튀르키예 정부는 필수품에 대한 가격통제를 부활시켰고, 암시장은 이 기회를 틈타 번영을 누렸다. 민주당 내 일부 인사들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주들에게 세금을 거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멘데레스는 본인도 대지주였던지라 이를 거부하고 계속 기계 수입을 고집했다. 그러나 토지를 [[트랙터]]로 경작할 수 있게 된 지주들은 소작농들을 이전보다 덜 고용했고, 직장을 잃게 된 소작농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했다. 그러나 이들을 수용할 일자리가 충분히 창출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실업자로 전락하여 대도시 주변에 슬럼가를 형성했다. 하지만 멘데레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국가가 개입하여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묵살하고 미국의 원조액과 차관을 수입품을 구매하는 데 대부분 사용했다. 그 결과 산업 분야에서의 발전은 지지부진해졌고, 사회 불안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멘데레스는 군부와 기존 엘리트들을 불신했고, 자신의 정책에 대한 반대는 자신을 축출하려는 음모라고 간주해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자신이 ‘국민의 전체 의지’를 대변하고 있으며 타락한 엘리트와는 대비되는 존재라고 선전하며 언론 통제를 가하고 관료와 군부 인사를 주기적으로 숙청했으며, 학술 활동에 대한 자유도 억제했다. 그러나 반발을 완전히 억제하는 건 불가능했고, 1957년 선거에서 민주당은 47% 득표에 그친 반면 공화인민당은 40%의 득표율을 회복하고 의석을 178석으로 늘릴 수 있었다. 멘데레스는 1957년 선거 후 "튀르키예는 이슬람 국가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공언하며 공화인민당을 무신론자의 당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조국 전선'이라는 이름의 대중 조직을 출범시켜 국민을 동원 및 통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농촌 지역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IMF]]로부터 추가로 3억 5,900만 달러의 원조를 받아 돈을 풀었고, 1958년부터 작황이 다시 좋아져 숨을 고를 수 있게 되었다. 1958년 4월 26일, 대한민국 정부가 멘데레스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1959년 2월 17일, 멘데레스는 이스탄불에서 런던으로 가는 특별 비행기 TC-SEV를 타고 가던 중 활주로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비행기가 짙은 안개로 추락한 뒤 화재에 휩싸이는 악재를 맞이했다. 그날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 16명 중 9명이 죽었고, 승무원 8명 중 5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비행기 뒷좌석에 앉아있던 멘데레스는 거의 다치지 않은 채 현지 주민들에게 구조되었고 런던 클리닉에 입원한 뒤 1959년 2월 19일 병원에서 키프로스 문제에 관한 런던 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1959년 2월 26일 귀국한 그는 영웅 대접을 받았고, 지지자들은 그를 알라가 선택한 인물로 추앙했다. 그러나 그의 승승장구는 여기까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